
1. 서론
1) 장신구의 의미
장신구란 우리들 신체에 직접 끼거나 거는 장식들과 옷을 장식하기 위해 붙이거나 늘어뜨리는 장식품 모두를 지칭한다. 안경, mp3 등과 같은 것도 장신구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보통 장신구라 하면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과 같은 것들만 생각한다. 한마디로 장신구는 인류가 살아오면서부터 함께 공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장신구는 인간의 미(美)적 욕구뿐만 아니라 악령을 물리치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호부용(護符用)으로도 사용되었다. 주술적인 부적의 재료로는 동물의 뼈, 조개, 보석류 등을 이용하였다. 또한 장신구는 공동체 내에서 권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이 변함에 따라 주술적인 의미보다는 미의식이 발달 하면서 미적 가치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종합해 보자면 과거의 장신구는 샤먼 같은 종교적 지배자들이 주술적 의미로 많이 사용해왔지만 점점 공동체 사회로 접어들면서 지배자들의 권력의 상징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다 현대로 점차 넘어오면서 일반 평민에게 보급이 되고 계급이 없어지면서 미적인 기능과 사람 자신들의 과시용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2)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지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금, 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장신구의 이해
2. 우리나라 장신구의 시대적 개요
1) 삼국시대
① 고구려
원래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적인 문화 위에 이웃 북부 중국의 한(漢) 육조문화 그리고 북부 중국을 거쳐서 스며드는 고대 서북방 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만주에 진출했던 흉노족을 비롯한 변방의 여러 부족을 통한 스키타이문화 등 북방계 문물과도 접촉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배경과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거센 기후와 황량한 벌판과 험준한 산악지대의 자연환경 속에서 말을 달리면서 끊임없는 외적들과 싸워 이긴 기마 민족의 기상으로 약 1C간 통구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분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장신구에는 관, 관식(冠飾), 귀걸이, 팔지, 반지, 머리핀 등이 있다.
- 관식으로는 원형 반달모양 꽃잎모양 등을 투조한 반월형 금동박판제가 알려져 있다.
- 귀걸이는 두 가지 형식으로 소환식 귀걸와 수식부 귀걸이가 있다. 귀걸이의 특징은 수하식에 있어 위는 구형이고 밑은 원추형을 이루되 모두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 반지는 청동제, 은제,금제 등이 있는데 안학궁지 2호분의 청동반지는 윗부분이 타원형으로 넓게 되어 있으며, 금반지는 금판을 가위 같은 것으로 베어 만든 것이다. 머리빗은 세봉(細棒)을 중앙에서 형으로 구부려서 만든 청동제와 은제가 있다.



② 백제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고구려를 통해 북조문화의 영향을 받고 중국 남조문화를 들여와 찬란한 백제문화를 형성하였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장신구류는 왕과 왕비의 금제 장식, 금제 목걸이, 왕의 머리뒤꽂이, 왕비의 은제 팔지, 마디 있는 목걸이 등 모두가 화려한 작품으로 AD6C 초반의 뛰어난 금속공예술을 보였다.
- 귀걸이는 대체로 두 가지 형식으로 분류되는데 그 하나는 고리가 하나로 된 소환식 귀걸이고 또 하나는 이환부 중간식 수하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귀걸이다. 재료는 금제와 금동제가 대부분인데 대체로 백제의 귀걸이는 신라에 비해서 화려 정교하지는 못한 듯하다.
- 비녀는 성양리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차신에 금으로 만든 다섯 개의 화판장식이 달린 것을 꼽을 수 있고 무령왕릉의 머리뒤꽂이는 머리부분을 날개를 펼친 조형금판에 눌러서 두드려 화형(花形)과 당초문을 나타내며 그 의형(意形)의 성격이 백제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무령왕릉의 목걸이는 매우 이형적(異形的)이다. 목걸이 중앙에 세환을 달고 거기서부터 굵은 순금제사(純金製絲)를 연결하여 마디를 걸도록 하였다.
- 무령왕비의 팔찌는 제작기풍이 매우 우아하다. 팔지 표면에 생동하는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용문(龍文)을 양각, 독특한 신비사상을 느끼게 한다.
- 백제시대에 이용된 옥류에는 유리가 가장 많지만 비취, 골석(滑石), 마노, 사문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옥의 형식에는 구옥(球玉), 관옥(管玉), 평옥, 대추옥, 아옥(臼玉), 곡옥 등이 많으나 곡옥이 가장 두드러진 편이다.



2) 통일신라시대
- 관모(冠帽)
대표적인 것은 건(巾)과 복두, 금관, 화관 등이 있으며 건은 삼국시대와 동일하였다.
┖ 복두
중국의 관제인 복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신라 28대 진덕여왕때였 다. 왕은 물론이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없이 남녀 모두가 착용하였으며, 양각의 처리, 복재, 수식재료, 복색 등에 따라 착용자 신분을 나타내었다. 흥덕왕 9년의 복식금제에 세, 나(羅), 시, 견(絹), 포(布) 등의 옷감이 보이고 있어 복두 재료의 사용은 독자성을 나타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당시의 복두는 당대의 복두제도와 같은 형태로서 각(脚)이 왕은 위로 우긋하고 신하는 아래로 향하는 것을 착용하였다.
┖ 화관(花冠)
왕비와 六頭品女는 당제를 모방한 화관을 착용하였다.
- 소(梳)
소(梳)는 머리 빗으로, 재료는 거북껍질과 뼈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금·은 등으로 장식하였다.
- 채(釵)
채(釵)는 치장용 비녀인데, 금, 은으로 누금하거나 주옥을 상감(象嵌)하여 장식하였다.



3) 고려시대
비녀 길이 27.0-36.0cm 고려-조선시대 부녀자의 늘어뜨린 며리를 풀어지지 않게 하거나 관(冠), 가(加)를 머리에 고정시키는 수식으로 위쪽의 크고 길이가 긴 비녀는 주로 의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는데 조선후기에 와서 사치가 심한 얹은머리가 금지되고 쪽머리가 일반화되면서 여러재료와 가공기술을 동원한 화려한 비녀 공예술이 발달하게 된다.
재료는 위쪽부터 금도금, 나무, 청동, 놋쇠, 백동, 옥이며 비녀머리의 수식에 따라 도금용두잠, 흑각민잠, 칠보매죽장, 화엽장, 죽절잠, 조리잠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특히 청동제죽절잠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잠두는 음양각하여 촘촘한 대나무 마디를 나타내었다.



3.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징과 유형
1)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징
조선초기에는 고려말기의 것을 그대로 습용하다가 제 4대 세종 8년에 조관 제복을 제정한 후 점차 정리되었다. 관모류에 있어서도 그 종류와 형태가 많아졌고 따라서 거기에 부착되는 그 장신용구도 많아지고 유교정책으로 인해 한층 규제되어 장신구를 만드는 장도 생기게 되었다. 관모를 만드는 입자장, 금박장, 패물장, 신을 만드는 화장 등이 생겨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업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몸을 단장하고 그 입은 옷의 맵시를 더 한층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꾸미고 가진 수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머리를 수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각종 비녀와 여러 가지 형태의 뒤꽂이,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첩지와 떨잠, 그리고 머리를 수발하기 위한 댕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중기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귀걸이와 가락지가 있다. 이밖에도 패물의 하나인 노리개, 향갑, 향낭, 침낭, 장도 등과 각종 주머니가 있었고, 원삼이나 여름철 적삼 등에 단 단추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다.
2) 조선시대 장신구의 유형
① 비녀 : 조선시대 여인은 쪽진머리의 부녀자 수식의 하나로 누구나 다 비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비녀가 다양하게 발전한 것은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의 일이다.
비녀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많이 달랐는데, 금, 은, 진주, 비취, 산호 비녀는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일반 서민은 나무, 뿔, 백동, 놋쇠 비녀를 주로 사용했다. 비녀 머리 부분의 형태도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어 왕비는 용, 봉 등의 형태를, 서민은 민자비녀 또는 버섯모양의 비녀를 착용하였다. 비녀머리 모양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여 계절에 맞추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녀의 자체의 재료 및 수식면에서 높고 얕고 좋고 그르고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식은 궁중이나 일반상류층에서나 모두 이와 비슷하였다.



② 머리장식 :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에는 뒤꽂이, 떨잠, 머리꽂이, 화관, 족두리, 첩지, 비녀, 댕기, 빗치개 등이 있다.
- 첩지는 부인이 예복을 입을 때 머리 위에 꾸며 품위를 돋보이게 하던 장식품의 하나인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 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여기에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장식의 목적과 족두리나 화관 같은 것을 쓸 때에 걸려서 고정시키게 하기 위한 역할을 겸하였다. 도금으로 만든 봉황첩지와 도금, 은, 흑색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가 있었는데, 봉황첩지는 왕비만 사용하였고, 기타의 것은 계급에 따라 내명부 또는 상류층 외명부들이 사용하였다.
- 떨잠은 일명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의식 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원형, 각형, 나비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으며, 칧보, 진주,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다.
-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을 말하는데,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이외에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 빗치개 뒤꽂이 등이 있었다. 국화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것, 매화, 나비, 천도, 봉황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이 있었으며 산호, 비취, 보석, 칠보, 진주 등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게 만들었다.
- 빗치개는 가리마를 갈라 머리를 정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도 되었다. 대개 빗이나 빗접, 면경, 쪽집개, 살쩍밀이, 분통 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쪽진머리에 꽂아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댕기는 머리를 묶는데 사용되는 헝겁으로 금박을 찍거나 수를 놓았고, 옥이나 석옹황 등의 보석을 붙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③ 귀걸이 : 귀고리는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 것으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많이 유행하였다. 그 후에 이 풍속이 오랑캐 풍습이라는 이유로 선조 때 고치게 하였으며,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또한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윤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귀고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여자는 귓바퀴에 거는 것을 많이 사용했다. 장식은 극히 단조로와 오색술을 달았고, 의식때만 주로 착용하였다.




④ 지환 : 반지와가락지는 노리개와 더불어 조선시대때 가장 일반적인 장신구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매우 단순했다. 가락지는 2개를 쌍으로 하여 금, 은, 비취 등으로 만들며 기혼부인이 사용했다. 이 가락지는 기혼, 미혼에 관계없이 일반 여인들간에 사용되었다. 남아있는 유물로서는 칠보, 옥, 마노, 호박, 비취, 동 등이 있으며 계절에 맞춰 끼는 멋이 있었다. 겨울에는 금지환, 여름에는 옥지환, 봄, 가을에는 파란 지환 등을 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가락지는 여름이라도 직금된 옷을 입을 때에는 낄 수 있었고, 겨울에도 옥지환 말고는 모두 낄 수 있으며, 봄, 가을에는 아무것이나 때와 옷에 맞추어 끼어도 좋았다.


⑤ 노리개 :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로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을 사용하여 단조로운 우리 나라 의상에 화려하고도 섬세한 미를 더해준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로서 전 시대에 많이 애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가 쇠퇴한 대신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장신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언제부터 패용되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시대에는 요대에 갖가지 장식품, 즉 요패를 달았다. 고려시대에도 요패를 착용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의 귀족계급 부녀들은 허리띠에 금방울, 금향낭을 패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노리개는 세 개를 함께 패용하는 삼작노리개가 대표적이며, 하나만을 패용하는 단작노리개, 또는 두 개, 다섯 개를 함께 패용하는 이작노리개와 오작노리개가 있다. 또는 다는 패물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며, 패물의 종류, 형태, 술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양하다.
재료로는 금, 은, 동 등의 금속류와 백옥, 비취옥, 자마노, 홍옥, 청강석, 진옥, 금강석, 공작석 등의 옥석류, 밀화, 산호, 진주, 금패, 대모, 호박 등의 보패류, 색사, 주단, 금은사 등이 사용된다. 형태에는 동자, 박쥐, 거북, 나비, 오리, 붕어, 매미, 자라, 해태 등의 동물형태와 가지, 고추, 포도송이, 목화송이, 천도, 연화, 석류 등의 식물형태, 호로병, 주머니, 종, 표주박, 북, 장구, 자물쇠, 안경집, 도끼, 방아다리, 방울, 투호, 장도, 석등, 벼루 등 생활주변에서 얻은 형태, 또 불수, 염주 등의 형태가 있다. 따라서 길상적인 문양을 보면적으로 택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다남, 부귀, 복, 장수를 뜻하는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와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고 향갑, 향낭, 침낭, 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 찬 것도 있었다. 이 중 향갑, 향낭은 사향등을 담은 주머니로 평소에는 향내음을 은근히 풍기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침낭은 바늘을 꽂아 두던 바늘집으로 부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바늘을 손쉽게 찾아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 부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한 노리개 중의 하나였다.
-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3) 장신구 기법
① 금부기법
금부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으로은 장신구에 순금박을 붙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순금박을 여러가지 형태로 잘라서 붙이면 문양의 표현도 가능하며, 붙이고 난후에 여러가지 처리로 색다른 효과를 얻을수있다. 금부작업의 원리는 이러하다.은이란 재료는 열을 가하면 끈적끈적한 접착력을 가지게 된다. 순도가 높은 은일수록 이러한 성질은 강하게 되며, 이러한 원리로 순금부를 붙을수 있게 되는것이다.
② 포목상감
포목상감은 철제은입사로 포목같이 쳐진 철물에 상감하는 방법으로 눈금상감이라고도 불리운다.
포목상감(布木象嵌)은 철제은입사로 포목같이 쳐진 철물에 상감 하는 방법이다. 대상 금속 판에 칼날 같은 정 으로 사도(四度)방향으로 선을 촘촘히 쳐낸다. 결과적으로 포목무늬처럼 보이는 금속판에 전연성이 높은 금이나 은선(0.1mm-0.01mm)을 박아 붙이는 기법이며, 이 기법의 장점은 가는 선에서 넓은 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③ 투조 (투각)
투조(透彫)는 문양이나 바탕의 어느쪽을 오려내므로서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서 이때 실톱으로 하는 방법과 끌로 하는 방법 등이 있다. 오려내고자 하는 부분의 한쪽 귀퉁이에 드릴로써 구멍을 뚫은 후에, 여기서 실 톱날을 끼우고 썰어나간다.
④ 낱알 기법 (누금기법)
금속의 작은 알갱이을 땜을 사용하지 않고 금속표면에 붙이면서 독특한 패턴과 질감을 만드는 기법이다. 독특한 표면질감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비교적 까다롭고 시간이 소요되어 현대의 금속공예가들에게는 그리 많이 활용되지는 않는다.
4. 결론
우리나라에는 금공의 우수함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유품이 많이 현존하며 특히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의 특징은 입사의 기법이라 할만큼 훌륭한 공예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그러한 훌륭한 기법은 체계적인 연구와 노력의 부족으로 점차 퇴보해 가는 느낌마저 없지 아니하다. 금속자체의 아름다운 색감을 다른 금속과의 조화 또는 대비로 좀 더 나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금속상감 기법을 보다 체계적인 기법의 정립이 이루어져서 현대 금속공예의 창조적 작업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지금 사는 21세기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존재해왔던 다양한 장신구의 스타일을 모두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유명 장신구 회사들과 현재까지도 고전적인 방법과 형태를 고집하는 장인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전문 디자이너들을 통해 옛 스타일을 리바이벌한 새로운 스타일로 새롭게 창조한 장신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교통의 발달로 세계 각국의 특색 있는 장신구들을 언제 어느 곳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최승욱, 「귀금속가공」, (한국산업인력공단)
해밀아트, http://blog.naver.com/jubiri/20051729297, (출처미상)
저자미상, 「조선시대 장신구」, (출처미상)
저자미상, http://cafe.naver.com/wewe11/12, (출처미상)